​소모

태도와 형식 사이: 프리뷰

 

2017.04.21

<태도가 형식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e Form)>라는 부제로 더 잘 알려진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의 전시 제목은 <당신 머릿속에서 사는 (Live in Your Head)>(1969년, 베른)이다. 이 제목은 태도란 무엇이며 태도는 어떻게 형식이 되는지 등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부제보다 더 명확할지도 모른다. 당대 서구 현대 미술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한데 모아, 전시 공간이 오로지 작품 감상만을 위해 존재하도록 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아니고 작품과 공간이 대등하게 어우러지도록 공간을 구성한 이 파격적인 전시는 현대 미술 전시의 고전이자 정석으로 일컬어진다. 50년이 지난 지금 이 전시 전경을 보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동시대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전시 서문에서 이 작품들의 공통점으로 언급되는 것은, 이들이 형식보다는 지적인(intellectual) 공통점이 있다는 것, 즉 하나의 태도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실지로 신사실주의와 팝아트에서부터 프로세스 아트와 퍼포먼스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작품들은 형식에 대한 반대 또는 변형을 통해서 어떤 태도에 무게를 실어주는 듯하다. 도록에서도 지적하듯이, 이러한 지적인 또는 개념적인 경향은 1913년 마르셀 뒤샹이 던진 질문 “미술 작품이 아닌 작품을 만들 수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의 개념에 대한 상징이 되는 모든 작품들은 “새로운 미술(new art)”라고 칭해진다. 이 새로운 미술들은 모두 우리 머릿속에서 살고 있는 하나의 개념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뒤샹의 질문은 100년이 지난 지금 식상하게 들리고, 더불어 이 새로운 미술들도 50년이 지나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이미 한국의 현대 미술도 어떤 ‘개념’ 또는 ‘관념’, 즉 idea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근현대미술을 둘러싼 이론들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현대 미술은 감상은 가능하더라도 이해는 불가능하고, ‘예뻐서 그렸어요/좋아요’라는 식의 명제는 미술작품을 옹호하는 데에 힘이 없으며, 이와는 반대로 감각적으로 큰 반향을 주지 않더라도 이면의 idea가 매력적이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idea가 현대미술의 필요충분조건이 된 상황에서 일련의 특이한 경향이 한국 현대미술작품들에서 보이는데, 이는 극도의 개념주의와 극도의 감각적 형식주의가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몇 가지 사례를 든다고 하더라도 일반화라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래도 예를 들자면, 시청각의 <정서영전>에서는 작은 한옥 방 안에 놓여있던 오브제들이 너무나도 단순한 form을 갖고 있어서 어떤 idea 또는 figure를 몇 차례 추상화한 결과로 보였고, 워크온워크에서 열린 이정민의 개인전 <헛기술>은 작가가 했던 헛된 산책의 상징화된 흔적이었다. 젊은 미술인들 사이에서 꽤나 주목받았던 이 전시들은 거의 모두 ‘글’이라는 구성요소를 갖고 있었는데, 이 글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전시된 작품들과 함께 어떤 무형의 idea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러한 특성은 개념주의 또는 관념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에는 또 하나의 특성이 결부되어 있는데, 다소 단순화되고 추상화된 form이 극도로 세련되고 감각적이라는 점, 그 감각성이 작품의 기반이 되는 idea와 거의 대등하게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작품들은 그 idea를 알지 못하더라도 시각적으로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러한 form의 중시는 형식주의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여기에서 idea와 form을 극도로 강조하는 일련의 한국 현대 미술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는 비단 미술 작품에서만 보이는 특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전시 비평글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 단어들을 나열해서 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전시/작품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 하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sns를 통해 회자되는 유명한 단편소설들은 서사의 힘보다는 글의 심상이 주는 이미지, 그 감각이 중심이 된다. 이 글들이 그저 단순히 장식적인 글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 첨예한 감각이 모호한 idea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글을 읽을 때 문자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하나의 idea를 형성하고, 그렇게 해서 그 글은 아마도 저자가 전제했을 어떤 idea의 파편화된 흔적이 된다. 그 idea의 종류는 다양하다. 하나의 감각일 수도 있고, 주의(ism)일 수도 있으며, 산책이나 기억일 수도 있고, 저자가 보았던 전시 전경일 수도 있다.

 

하나의 idea를 가진다는 것은 하나의 태도(attitude)를 견지하는 것이다. <태도가 형식이 될 때>展이 상정하는 뒤샹의 질문은 미술가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널리 알려져 있듯이 ‘현대미술’의 태도를 창시한 것은 마르셀 뒤샹이었다. 남성용 소변기에 다른 사람의 서명을 하는 제스처는 뒤샹 이래 거의 모든 현대미술작가들에게 요구되고 또 그들이 성공적으로 행한 ‘미술작가의 태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현대 미술에 있어서 극도의 관념과 극도의 형식주의가 결부된 것은, 어쩌면 예정되어 있었던 일일지 모른다. 태도는 형식을 만들고 형식은 태도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현재 문화예술계에서 이처럼 태도와 형식이 긴밀히 접해 있는 또 하나의 분야가 있다. 바로 굿즈(goods)다. 어떤 문화예술작품이나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소량생산으로 만들어진 예쁜 소품인 굿즈는 사실 계속 있어왔던 것이지만 최근에 와서야 ‘굿즈’라고 명명되었다. 반 구호를 적은 단체티셔츠나 기업 로고가 박힌 머그잔 등이 과거의 굿즈였다면, 요즈음에는 보통 디자이너나 미술작가가 세련되게 만든 뱃지, 포스터, 엽서 등등 다양하다. 무형의 것을 유형의 것으로 나타내는 것은 인간이 물질적 존재인 이상 필연적이지만, 오늘날의 굿즈 열풍은 주목할 만하다. 페미니즘의 예를 들어 보자. 문화예술에 민감한 젊은이들 사이에서 주로 sns 상에서 퍼진 ‘페미니즘’씬에서는 주로 특정 굿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특정 idea를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굿즈는 특정 idea에 대한 동의뿐만 아니라, 그 주의(ism)의 실천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굿즈 판매전은 그저 형식적으로 예쁜 물건들의 집합에서 나아가 온갖 idea, ism의 집합, 그것과의 정체화/동일시(identification)의 장이 된다. 그리고 이 때 굿즈 판매의 성공은 그 ism의 정당성이나 탁월함에도 달려 있지만, 굿즈 자체의 시각적 아름다움과 세련됨에도 크게 좌지우지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상품의 힘 때문인지, 한국 사회의 문화예술계가 이제야 누리게 된 물질적 풍요로움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굿즈라는 오브제에 있어서 form과 idea가 중시되며 어우러지는 모습은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보이는 것과도 유사하다. 실제로 특정 굿즈를 생산, 구입, 향유하는 층은 한국 현대미술계의 생산, 감상층과도 널리 겹쳐있을 것이다.

 

2010년대 들어 미술계와 젊은 문화예술계에서 나타난 이러한 고도의 개념주의와 형식주의를 어떻게 봐야 할까? 뒤샹이 창시하고 제만이 공식화한 ‘새로운 미술’의 필연적 변형/발전일까? 신자유주의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종류의 물신주의일까? 그저 정치적 또는 지적 태도의 고취일까? 아니면 문화예술, 또는 더 나아가 몇몇 사람들의 정신성과 감각성의 예민한 성장일까? 본 지면에서는 이러한 태도와 형식 사이에서 진동하며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 또는 오브제들을 바라보고자 한다. 다소 추상적이고 장황한 이 글은 그러한 앞으로의 글쓰기의 프리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