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팎

필립 골럽을퀴어하게 읽기

 

2017.04.21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실비아 슬레이(Sylvia Sleigh)가 그린 필립 골럽(Philip Golub)을 알게 된 것은 아마도 대학에 다닐 때 어느 수업에서였을 것이다. 페미니즘 미학 수업이었을 수도, 미술론 수업이었을 수도 있겠다. 흔히들 말하는 대로 배웠다. 남성 작가가 여성 누드를 그리는 미술계의 관행을 깨고 그 반대의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 요새 말로는 ‘미러링’ 함으로써 — 전통의 불합리함을 고발하는 작품이라고 말이다.

 

그때부터 약간의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앵그르의 〈터키탕〉을, 혹은 티치아노의 〈비너스〉를 뒤집어 그리면서도, 그 주인공들의 관능은 왜 가져오지 않는가, 왜 실비아 슬레이의 모델들은 이상적인 남성의 몸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말이다. 또한 흔히들 말하듯, 실비아 슬레이의 캔버스에 가로 누운 것은 이를 테면 다비드와는 거리가 먼, 어쩌면 ‘중성적인’ 필립 골럽이다.

 

‘중성적인’이라는 말과 ‘남성’이라는 말은 양립할 수 있는 말일까. 많이들 쓰는 말인 것은 물론 알고 있다. 거기에는 어떤 성향을 보이건 남성은 남성이고 여성은 여성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페니스가 있으면 남성이고, 질이 있으면 여성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실비아 슬레이의 캔버스 속 인물을 중성적인 남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그에게 페니스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실비아 슬레이의 그림을 여성의 몸에 부과되는 어떤 시선들, 어떤 규준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읽는다면, 어쩌면 그 비판은 조금 더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은 여성의 몸을 가져야 한다는 — 그러니까 질과 유방 등등을 가져야 한다는 규준에 대한 비판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터키탕을 여탕으로, 필립 골럽을 여성으로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페니스를 가진 이가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주어졌던 어떤 자리에, 어떤 역할에 들어가게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런 상황을 가리키는 말은 나는 몇 가지 알고 있다. 때로 그런 일은 드랙(drag) 과정에서 일어나고, 때로 그런 일은 트랜지션(transition) 과정에서 일어난다. 워드프로세서가 빨간 줄을 긋는 이 단어들은, 아직 일반인의 언어 목록에 등재되지는 않은, 퀴어 정치학의 용어들이다.

 

드랙퀸이라는 말이 조금은 더 익숙하겠다. ‘밤무대’ 같은 곳에서 ‘여장’을 하고서 쇼를 선보이는 남성들 말이다. 종종 게이인 그들은 메이크업을 하고 의상을 입음으로써 여성의 위치에 간다. 그것을 우리는 여장이라고, 혹은 드랙이라고 부른다. (모든 드랙이 여장인 것은 아니다.) 실비아 슬레이의 그림을 나는 드랙으로 읽는다. ‘여성의 포즈’를 취함으로써 행해지는 성별간의 경계 넘기 말이다. 머리를 기르고, 전형적으로 여성의 관능을 드러내는 포즈로 누운 필립 골럽을, 나는 드랙퀸으로 읽는다.

 

트랜지션이라는 말은 조금 더 낯설지도 모르겠다. 트랜스젠더가 자신이 원하는 성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트랜지션이라고 부른다. 단적으로는 성별 재지정 수술이 그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트랜지션이라는 한 단어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없이 분기하는 욕망들을 담고 있다. 몸을 변형하지 않은 채 사회적 지위를 바꾸는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실비아 슬레이의 그림은 일종의 트랜지션을 담은 것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필립 골럽은 드랙퀸에 이어 이제 비수술 MTF 트랜스젠더— 수술하지 않는, 남성으로 판정 받았으나 여성 정체성을 갖는 트랜스젠더— 가 된다. 여성의 자세로 눕는 것, 그것이 그가 행하는 트랜지션이다.

 

여성을 소수자라고 한다면, 실비아 슬레이의 그림에서 보이는 이러한 드랙 혹은 트랜지션은 ‘소수자 되기’라고 할 수 있겠다. 단순히 외관상의 유사성을 획득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여성이 처한 위치에 직접 들어가고자 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남성적 시선 앞에 여성의 자세로 스스로를 노출 시킴으로써 필립 골럽은 — 단순히 미러링의 한 요소가 아니라 — 남성중심 사회에서의 소수자가 된다.

 

필립 골럽이 남성으로서가 아니라, 드랙퀸으로서, 혹은 트랜스젠더로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은 동시에 남성적 시선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여성의 몸만을, 여성적인 것만을 관음해 온 남성의 시선은 자기 앞에 가로 누운 필립 골럽에게서 무엇을 읽어야 할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동일시하거나 선망할 만한 이상적인 남성의 몸도, 자신이 탐할 만한 이상적인 여성의 몸도 아닌,실은 성별을 알 수 없는 이 몸 앞에서 남성적 시선은 붕괴하고 만다.

 

남성적 시선이 붕괴한 자리에는 어떤 시선이 들어설 것인가. 나는 그것이 그저 관찰하는 눈이기를 바란다. 필립 골럽의 머리를 자르거나 페니스를 숨기지 않는 시선, 규준에 맞지 않는 그의 몸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시선 말이다. 그러니까, 이 캔버스와 이어져 있는, 바로 그 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