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팎

놀이터를 생각하며

2017.06.16

그는 이사무 노구치(1904-1988, 미국 태생의 조각가)의 놀이터가 안전을 이유로 개축된 것을 아쉬워 했다. 제일 높은 그네는 철거되고, 미끄럼틀 난간에는 손잡이가 생기고, 이런 식의 변화들을 그는 마뜩지 않아 했다. 나는 그 정도 차이가 무어 그리 대수인지 알지 못했다. 그네는 여전히 그네였고 미끄럼틀은 여전히 미끄럼틀이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에야 깨달았다. 내가 차이를 알지 못한 것은 바로, 그네는 여전히 그네였고 미끄럼틀은 여전히 미끄럼틀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음을 말이다.

 

나는 시골에서 자랐다. 학교 운동장에 놀이기구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쉬는 시간에나 이용할 뿐이었다. 방과후나 휴일에는, 집에서 먼 학교 대신, 동네 뒷산에서 놀곤 했다. 저수지에서 거머리에게 뜯기며 피라미를 잡거나 산비탈을 뛰어 다녔다. 자갈밭에서 넘어져 무릎이 까지는 건 일도 아니었고, 자칫 발을 잘못 딛으면 굴러 떨어질 수 있는 절벽 가에서도 겁없이 놀곤 했다.

 

그런 내게 좀 높은 그네나 난간 없는 미끄럼틀은 애초에 위험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조금 특이하다곤 해도, 그런 식의 놀이터는 어떤 모험을 할 수 있는 곳, 상처 입기를 무릅쓸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애초에 안전한 그곳에 난간이 생긴다 한들, 특별한 제약이 가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아쉬움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놀이터가 없었던, 장난감이 흔치 않았던 시골마을에서 놀이란 주어진 무언가를 갖고 하는 것이기보단 새로이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었다. 흙을 모아다 개울에 둑을 쌓고, 기왓장을 주워다 미니카 레일을 만들고, 나뭇가지를 깎아 자치기를 하고, 페트병을 잘라 통발을 놓고 ― 그런 일들은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이나, 혹은 비밀 언어를 하나 만드는 것만큼이나, 나름의 창의성을 요하는 일이었다.

 

동네마다 노는 법도 달랐다. 강이 있는 동네에서는 낚시를 했고 개울이 있는 동네에선 멱을 감았다. 풀밭이 있는 동네에선 삘기를 뜯어 먹었고 언덕이 있는 동네에선 썰매를 탔다. 어느 동네에서 무엇을 하고 놀지 정하는 것이, 그리고 그 동네까지 한참을 걸어 가는 것이, 놀이의 시작이었다.

휴대 전화도 없던 때였으므로,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건 간섭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었고 독초를 먹고 배탈이 날 수도 있었으므로, 놀이는 동시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하나의 과제이기도 했다. 때로는 길을 잃었고 때로는 진이 빠졌다. 내내 즐거웠던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모험이라는 말조차 모른 채, 날마다 모험을 했다.

 

 

 

놀이터를 생각한다. 서울에서는 한 동네에도 몇 개씩이나 있는, 놀이터를 생각한다. 똑같이 생긴 그네와 똑같이 생긴 미끄럼틀이 있는, 똑같이 생긴 정글짐과 똑같이 생긴 하늘사다리가 있는, 놀이터를 생각한다. 이제는 모래로도 모자라 푹신한 우레탄이 깔려 있는, 그런 놀이터를 생각한다.

모르는 것이라곤 없는 ― 떨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마저를 아는 그런 곳에서 매일 논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아무것도 만들지 않아도 되는, 아니, 무언가를 만들어도 쓸데가 없는, 그런 곳에서 매일 논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나로서는 상상이 어렵다. 새로움 없는 세계에 사는 것은 지루한 일임을 알 뿐이다.

 

이사무 노구치의 놀이터는 예술과 놀이의 경계를 허문다. 그러나 이런 말은 요령부득이다. 내게는 처음부터 그런 경계란 없었으므로 말이다. 놀이란 언제나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서 시작했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것으로 끝났다. 실력 있는 작가가 만든 작품을 보며 무언가를 깨닫기도 하는 요즘보다는, 서툰 손으로나마 스스로 만든 장난감과 규칙들로 자기만의 세계를 꾸몄던 어린 시절에 나는 더 예술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칠 권리, 부술 권리에 대해 생각한다. 어린 시절의 내게 번듯한 장난감은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로써 나는 당당히 다칠 권리를, 무언가를 부술 권리를 가졌다. 몇만 원짜리 변신 로봇은 부수면 안 되는 물건이었지만, 내가 나무를 깎아 만든 장난감은 언제든 부수어도 좋은 물건이었다. 학교는 다치면 안 되는 공간이었지만, 동네 야산은 다치는 것이 당연한 공간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무언가를 부술 수 있고 제 몸을 상처 입힐 수 있음으로써, 나는 자유로웠다. 아무런 금지도 제약도 없었으므로.

 

놀이터를 생각한다. 그곳이 단순히 주어진 규칙을 지키는 공간, 그로써 안전하게 시간을 보내고 떠나야 하는 공간으로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동네의 놀이터와 옆 동네의 놀이터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기를, 그래서 내가 무언가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놀이터라는 게토가 사라지기를 바란다. 어디서든 놀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한다.  하루하루가 모험인 어떤 삶을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