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팎

이미지가 형상이 될 때

2017.12.10

이런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드리핑 기법을 이용해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는 한귀퉁이에 붉은색, 노란색, 녹색의 원 세 개를 그려둔 그림이었다. 추상회화를 읽는 능력이 없는 내게 그것은 얼룩에 지나지 않았다. 그 때 곁에 있었던 친구는 그 그림이 혼돈과 질서, 카오스와 코스모스를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그는 답했다. 귀퉁이의 원들은 신호등이라고, 질서를 표현하는 신호등이라고 말이다.

작가조차 기억나지 않는, 좋아한 적도 없고 지금 좋아하지도 않는 그림 이야기를 꺼낸 것은, 최근 한 가지 고민을 하면서 그 그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민이란 다름아닌 이것이다. 얼룩은 언제 회화가 되는가? 바꾸어 말하자면, 어떤 이미지는 언제 형상이 되는가? 여기서 이미지란 그게 어떤 것이건 시작적 정보를 담고 있는 무언가를 말하고, 형상이란 시각적 자극 이상의, 이를테면 인지적인 자극 같은 것을 담은 이미지를 뜻한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나는 저 그림을 떠올렸다. 내게 그저 얼룩이었던 그 그림은, 내 친구에게는 어떻게 어떤 의미를 담은 회화가 되었는가?

 

최초에 이 질문은 “추상은 언제 구상이 되는가?”였다. 그러나 질문을 이렇게 구성할 때 나는, 사전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추상과 구상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래서 바꾸어 쓴 것이 방금 본문에 쓴 표현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할지도 모르겠다. 색색의 원 세 개라는 추상일 수도 구상일 수도 있는 이미지가, 나에게는 무의미한 추상으로, 친구에게는 신호등이라는 구상으로 가 닿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어 본다. 추상은 언제 구상이 되는가?

 

신하정이라는 작가가 있다.* 그의 캔버스에는 낮은 채도의 어떤 덩어리들이 자리한다. 자세히 보면 덩어리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약간 짙은 색을 한 납작하고 긴 아랫부분과, 그보다는 밝은 색의, 대개는 조금 더 높이가 있는 윗부분으로 말이다. 〈뒷모습〉이니 〈코끼리〉니 하는 이 덩어리들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것들은 수석壽石들이다. 당신도 알고 있는, 자연에서 생겨난 돌이지만 묘하게 무언가와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 (모든 수석이 이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돌들 말이다.

 

친구가 신호등을 알아보았듯, 나도 이번에는 얼룩에서 무언가를 알아챈 것이다. 나는 이 작품들을, 얼룩이 회화가 되는 순간, 이미지가 형상이 되는 순간을 표시하는 것으로 읽기로 했다. 다시 돌아가, 물음에 답할 차례다. 얼룩은 언제 회화가 되는가? 이미지는 언제 형상이 되는가? 이미지 자체가 가진 힘이 스스로를 초과할 때, 그리 함으로써 스스로를 어떤 형상으로 내어 보일 때 ― 같은 멋들어진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하려는 답은 그런 것은 아니다. 나의 답은 이것이다. 관람자가 어떤 해석틀을 부여할 때,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얼룩을 회화로, 이미지를 형상으로 알아볼 수 있는 관람자가 있을 때, 그것은 회화가 되고 형상이 된다.

 

그러니까, 내 친구가 있을 때에야 그 원들은 신호등이 되고, 내가 있을 때에야 그 덩어리들은 수석이 된다는 뻔한 말이다. 관람자의 존재론적 지위 같은 것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인식론이다. 거창하게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인과라는 선험적** 개념이 있어야 어떤 현상을 인과적인 사건으로 인식할 수 있듯이, 신호등이라는 개념이 있어야, 수석이라는 개념이 있어야 그 얼룩들을 회화로서 감상할 수 있다. (때로 그 개념을 제공하는 것이 ― 어떤 의미에서도 그것들이 선험적 개념은 아닐 것이므로 ― 작품 자신이더라도 말이다.)

 

신하정의 작업이 얼룩이 회화가 되는 순간, 이미지가 형상이 되는 순간을 표시한다고 말한 것은 그 작품들이 어떤 내적인 힘을 갖고 관람자를 그러한 감상으로 끌어들인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선행하는 틀 없이는 인식불가능한 지점, 반대로 간단한 해석틀 하나만으로도 쉽사리 이해에 포섭되는 지점, 그 경계를 표시한다는 뜻이다. 실은 이론적 해석을 얻어내지 못한 많은 추상회화들이 그 언저리에 있다. 누군가는 이해하고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하는, 그 경계의 언저리에 말이다.

 

이제 와서 비평의 중요성을 강조할 일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부르디외 식의, 고급예술은 어떤 계층의 구별짓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자발적 문외한에 가깝다. 나의 질문은 실은 다른 데에 있다. 이 털 없는 짐승이라는 종의 개체들은 언제 인간이 되는가? 이 털 없는 짐승에게는 말하는 동물이니 이성적인 동물이니 하는 수많은 별명들이 있다. 그런데, 말하지 못하는 개체라면, 이성적이지 못한 개체라면 이들은 언제 인간이 되는가? 이미지가 형상이 되는 순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인간으로 식별하는 다른 개체 앞에서, 그들은 인간이 될 것이다. 질문은 돌아온다. 그 다른 개체는 그들을 어떻게 인간으로 식별하는가?

 

신하정의 그림들이 조금 더 그 경계지점에 머물기를 바란다. 추상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으면서도 스스로가 수석임을 내어보일 수 있는 그 지점에 ― 수석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추상적 구상이라는 점에서 그 지점은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조금 더 머물기를 바란다. 말 못하는 개체들이 말을 배우지 않고서도, 이성적이지 못한 개체들이 감성을 억누르지 않고서도, 인간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그 자리에, 조금 더 머물기를 바란다.

 

내가 할 일은 분명하다. 수석이 무엇인지를, 말 못하는 인간, 이성적이지 못한 인간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조용히 외치는 것.

* 나는 이 작가를 《고무고무 ― 열여섯의 움직이는 기술》(서울: 서교예술실험센터, 17.12.08-28.)이라는 전시에서 처음 접했다. (이렇게 정리해버려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대개는 한동안 활동이 뜸했던 작가들이 마음을 다잡으며 연 전시였던 탓일까, 인터넷 상에서 내가 본 작품들의 이미지를 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지를 삽입하지 않은 것이, 다만 쉽게 구할 수 없어서만은 아니다. 몇 줄 안 되는 묘사를 통해, 당신은 어떤 수석을 얼마만큼의 선명도를 가지고 떠올렸을까? 그것은 신하정의 그림과 얼마만큼의 거리를 갖고 있을까?

** ‘경험을 통해 획득된 것이 아닌’ 정도의 의미로 읽으면 되겠다.